뮤지션에게 필요한 것
뮤지션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다.
자신들의 사운드에 대한 자신감말이다. 그것이 똥이든 황금이든 일단 결과물을 내놓고 평가를 받아야한다.
그리고 나서 사운드에 관한 고민이 생기는 것이다. 주저주저하고 있다면 그것은 결국 아무것도 해보지 않고서 좋은 결과를 바라는 혹은 발전이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마주한 자신을 바라보며 점점 자신감을 상실하는 결과만을 가져올 뿐이다.
노래하는 사람이라면, 노래를 녹음하며 그 결과를 바탕으로 성장하는 것이며, 악기연주자라면 자신의 연주를 녹음해서 평가를 내려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평가를 내릴 수 는 없기 때문이다. 그러다보면 기존의 나온 좋은 사운드들과 비교하게 되고 그 비교를 통해서 성장의 발판이 될 것이다.
더 나은 것이란 그런 가혹한 평가를 통해서 이루어 지는 것이다. 자신을 알아가는 과정을 통해서 변화되는 사운드 그리고 자신감을 얻게 될 것이다. 뮤지션이라면 자신을 돌아보고 평가할 수 있어야 하며, 자신의 사운드에 자신감을 가져야한다.
자신감이 곧 그 뮤지션의 힘이다.
그리고 그 누구도 자신의 사운드를 대신 만들어 줄 수는 없다.
가난이 창피한 것은 아니지만 자랑할만한 것도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길을 찾아…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정확하게 알지 못한다면, 난 분명 길을 잃은 것이다. 그런데 그곳에 멍하니 서있는다고 잃어 버린 길을 찾을 수 있는 건 아니다. 분명 어디론가 방향을 틀던지 가던 길을 계속 가던지 결정해야한다.
머뭇거리고 있는 지금도 시간은 흐르고 있으며 빠져나가는데 걸리는 시간은 더 오래 걸릴 뿐이다.
대화
“대화”는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도구가 아니라 “서로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며 이해하게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방어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들의 대화는 늘 끊어지기 마련이다. 이런 성향의 사람들은 자신의 의견과 대립되면 그냥 무시하게 되거나 공격하게 된다. 이것은 “대화”를 현명하게 이끌어 가는 것이 아니라 생각된다. 대립되면 “설명”하면 된다. 이해하게 설명하되 다른 사람의 “의견”이 맞다면 존중하거나 그의 준하는 태도를 보이면 된다. “설명”으로 안되면 적절한 “예시”를 제시하여 설명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런 저런 방법을 다 써봐도 “대화”가 진행이 안된다면, 그것은 “대화”가 아니며 “독백”이 되어 버린다. 상대방은 더이상 “경청”하는 사람이 아니라, ‘어디 한 번 지껄여 봐라~’ 식이기 때문에 벽과 얘기를 나누는 것과 다를 바없는 상황이다.
이처럼 “대화”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다. 결국 “관계”를 이어주는 역활을 하는 것이 “대화” 인 것이다.
지식의 확장과 전달…
대단한 것들은 대부분 별거 아니다. 그것이 대단해 보이는 것은 나의 무지에서 혹은 경험부족에서 오는 경우가 많다. 내가 잘 몰랐을 때 들었던 부분이 이해가 된 다음 돌아보면, 오류투성이의 내용인 경우도 많다.
그래서 난 내가 가르치는데 있어서 최소한의 오류를 범하려한다. 그리고 나에게 무엇인가를 배우는 사람도 나를 대단하게 바라보며 동경의 대상이 아닌 추월의 대상으로 보길 원한다. 내가 일단 이사람 만큼은 해야지 혹은 뛰어넘어야지라고 생각하며 일을 하고 공부하면 좋겠다. 그것이 아니라 단지 바라봄의 대상이 되어서 내가 이사람만큼 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한다면, 그것은 자신을 퇴보시키는 길일 것이다.
선생은 앞길을 닦아주는 사람이다. 앞에 버텨서서 가지 못하게 혹 넘지 못할 장애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그렇게 지식의 층은 전달이 되는 것이라 생각한다.
감성적인 동물…
우리는 소설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기도 하고 웃기도 한다.
배경음악도 이미지도 없는, 단지 “글”만 적혀 있는 책을 보면서 말이다.
그만큼 우리는 감성적이고 자신의 감정을 잘 대입하게 된다.
그런데 이런 감정적인 인간들이 현대사회를 살면서 겪는 문제가 하나있다.
바로 급격히 발전하고 있는 ‘쪽지’와 ‘문자’가 그것이다.
그냥 보내는 쪽지와 문자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무엇인가를 지적하거나 혹 서로 얘기중에 오해가 생겼거나 하는 문제가 발생한 이후에 보내지는 쪽지는 상황이 다르다. 그 이유는 우리들은 당시 감정을 모두 쪽지와 문자에 집중해서 대입하고 분노 혹은 슬픔을 쏟아 붇는다. 특히, “^^”,”^^;;” 같은 이모티콘이 없거나 글만 적혀 있을 경우 더 “자신의 감정” 만 대입하여 문자를 해석한다. 그러다보니 때론 상대방의 생각과는 전혀 다른 의미로 전달되는 경우가 생긴다.
그래서 누군가와 대화를 ‘더’ 잘 진행하고 싶거나 문제가 있을시에는 절대로 ‘쪽지’나 ‘문자’로 이것을 전달하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다. 자신의 의도는 그렇지 않더라도 문제는 그 ‘쪽지’나 ‘문자’를 받게 되는 상대방의 기분이다. 다시한번 말하지만 “인간은 굉장히 감성적인 동물”이다.
서로 좋은 대화를 이끌고 싶다면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하길 바란다. 그것이 최소한 상대방의 대한 예의라고 생각한다.
p.s 아… 이 아날로그 인간의 슬픔이여…
시간은 나를 배려하지 않는다.
너무 슬프고 화나고 억울하여 멈춰있을 때에도
밤은 지나가고 아침은 찾아온다.
이말은 내가 어떤 상황에 처해있던지 시간은 간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난 지금 이렇게 주저하고 있을 수 없다.
지나가는 시간에 몸을 맡기어 일어나 움직여야 한다.
그냥 정체하여 있다면 난 점점 퇴보하고 굳어져 마치 비석처럼 그 땅에 몸을 박고 서있을지도 모른다.
지금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움직여야한다.
그래야 잊을 수 도 있을테니까.
나는 행복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누구 누구를 보면 너무 불행하게 살잖아요. 전 그보다 행복하게 사는거 같아서 행복합니다.”
당신의 행복이 누군가와 비교해서 얻은 것이라면 그것은 거짓 행복이다. 그건 단지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서 자신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어떤 인물을 두고 비교하면서 그 인물을 죽이는 행위이며 자신은 그것으로 아주 잠깐 행복하다고 착각을 하게 된다. 나의 행복은 내 자신에게서 찾아야한다. 나의 존재에서, 나의 상황에서 말이다. 그 누구와 비교해서도, 끌여 들여서도 안된다. 진짜 행복을 찾고 싶은가? 자신을 돌아보길 바란다. 그 안에 행복이 있을 것이다.
점수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
지금 우리는 모든 것이 통계화되고, 점수화되어서 구분되어진 시대를 살고있다.
당신의 미모는 몇점이며, 당신의 대인관계는 몇점이며, 당신의 인성은 어느군에 속하는지까지 평가를 받고있다!
그리고 이렇게 산출된 점수를 가지고 우리는 줄을 세운다. 또한 그 줄은 굉장히 중요한데… 그 이유가 당신의 성공과 굉장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우리는 몇가지 과목의 점수를 기준으로 아이들을 구별하게된다. 그중에 우수한 점수를 가진 아이들은 영재라는 호칭을 붙이고 이들을 꾸준히 개발시킨다. 그 결과 좀 더 우수한 아이들이 만들어진다. 거의 100점이라는 만점에 근접하거나 100점이 되게 만들어 놓는다. 그리곤 특수학교, 특수교육을 통해서 또 분류된다(이 과정에서 생기는 낙오자들은 단지 희망이 없는 아이들로 분류된다). 이후, 사회로 방출하게되는데 이미 이들의 인성까지도 점수로 반영되어 있다. 하지만, 이 점수라는 것이 얼마나 포장되기 쉬운 부분인가? 그냥 그런척 하면 된다. 이미 수많은 통계치를 가지고 우리는 이러 이러한 답안을 가지고 있으면 이런 아이일 것이라는 게 분류가 되어 있는 상태이다. 이 수치만을 알고 있다면 우리의 인성은 최고점을 받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렇게 진짜 자신을 숨기고 사회 속에 묻혀 살아간다. 그러다보면 점점 위로 더 올라가야하는 시점에 도달하게 된다. 위로 올라갈려면 더 많은 경쟁자들을 밟아야하며, 그들을 밟고 올라가는 과정에서 이들은 아무런 죄의식 조차 없는(걸리지 않으면 자신의 점수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재수없게 걸리는 사람들은 뉴스에서 만나게 된다) 상태로 고공행진을 하게된다. 그리곤…최고가 되어 사회를 지배한다. 우리는 이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도 모르고 최고 대우를 해준다. 단지 그의 점수를 보고 말이다.
자…점수가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대변 할 수 있는가? 이미 우리는 너무 많이 와버렸다.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최소한 우리 아이들에게 이런 삶을 살게해야 하는지 고민은 해봐야하는 것 아닌가? 우리는 이런 시대에 살고 있지만, 다음 세대를 살아야 하는 아이들에게 똑같은 기준으로 살아가게 할 필요가 있는가?
아름다움을 점수로 매길 수 있는가? 내가 느끼는 감정을 점수로 표현 할 수 있는가? 당신의 사랑은 몇점인가? 사람을 평가하기 위한 점수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의 수학 점수가 낮다고 해서 그가 바보인가? 다른 분야에서 잘 할 수 있는 기회조차 뺐어야 하는가? 각자가 할 수 있는 것이 있고, 개성이라는 것이 있다.
옛 시대는 각자가 할 수있는 것을 가지고 가치판단을 부여했지만 지금은 모든 것을 두루잘해야만 가치판단에 우위에 서게된다(아니 어쩌면 그런 시대는 단, 한번도 없었을지도 모르겠다). 무엇인가 잘 못 돌아가고 있는거 같다.
최소한 우리 아이들이 혹 그 다음 아이들이라도 살고 싶은 모습이 진짜 인정되는 삶이 되길 바란다.
그것이 행복이고, 삶이 아닐까?
저 끝을 알 수 없는 곳에 몸을 던져 나아갈 자신이 있는가?
저 수평선 너머에 무엇이 있을 줄 모르고 나아가는 것…두려움
그 두려움을 극복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새로운 경험
새로운 경험을 토대로 우리는 점점 성숙해간다.

